취업수기
취업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네이버 블로그에 적을 수도 있지만 너무 개인적인 이야기라 우선은 깃헙에 올려두고 보관하려고 한다 :)
우선 나는 6년 차 서비스직이었다.
프로페셔널한 커리어를 가진 공연기획자가 되는 것을 꿈꿔왔지만 현실은 현장에서 좌석 안내를 해주는 안내원이었다.
나는 내가 심즈처럼 말단에서 하나하나 올라가는 직장인이 될거라고 생각했지만
다니던 회사가 망하고, 그 회사에 다시 입사하면서 다시 도돌이표 같은 커리어에 반복이었다.
내가 몸 담았던 회사는 대단한 경력의 대표와 친절하고 따뜻한 직원들이 있었지만
사업을 확장하고 유지하고 보전하고 성장시키는 능력은 완전히 00년대를 답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처음 근무를 시작한건 모 공연장의 안내원이었다.
명문대 연극영화과에 지원했으나 실기 면접을 보는 교수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완전히 상처 입었던 입시생은
가나다군에서 가나군 모두 불합격하고 보험으로 들어둔 다군으로 지원한 대학에 입학했다.
복수전공을 통해 학교 내의 연극영화과에서 공부하려고 했으나 복수전공 지원 당시인 2학년 1학기부터 연극영화과는 복수전공을 ‘절대’ 받지 않겠다고 했다.
학사팀에 여러번 문의했으나 수업을 듣는건 자율이지만 성적은 정상적으로 받을 수 없고
심지어 연극영화과는 용인에 나는 서울에 있는 과 학생이기 때문에 등교하는 것조차 힘들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하고싶은 공연을 하려면 억지로라도 공연에 발을 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교 근처 공연장에서 안내원 면접을 봤다.
그렇게 공연장에서 일하면서 가슴 뛰는 경험을 많이 했다.
하지만 안내원은 그야말로 안내원 ‘취급’을 받기 일쑤였다.
공연 산업의 일부가 아닌 그냥 ‘안내원’ 그 자체였다.
일을 잘 하는 바람에 인정도 받고 공연장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누구에게 명함을 내밀 수는 없는 커리어였다.
회사는 점점 다른 사업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그동안 잘 해오던 공연장 관리나 기존의 공연은 하지 않으려고 하고 자체 컨텐츠에 집중했다.
실행했던 자체 컨텐츠는 그야말로 적자 중에 적자를 남겼다.
그것을 회복하려고 다른 컨텐츠를 가지고 전시회를 기획했다.
그러다가 나에게 그 전시에 ‘티켓매니저’로 가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티켓매니저는 나름대로 굉장한 권력이 있는 자리였다.
안내원 일을 할 때 컴플레인이 생기면 일단 티켓부스로 안내했다.
컴플레인의 결말은 사과와 환불 혹은 새로운 티켓인데 이 모든 일은 티켓부스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공연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티켓일을 잘 배우면 공연일에 잔뼈가 굵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티켓매니저 생활이 시작되었다.
전시는 잘 안되었다. 무슨 농간처럼 사건이 터지고 사람들의 열광적인 기대가 식어버렸다.
우리는 매일 욕을 먹었고 욕을 또 먹었다.
나도 당당하게 엄마아빠한테 무슨무슨 공연이나 전시에서 일한다고 하고 싶었는데, 엄마아빠는 무슨 친구들에게도 말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쉽게 말하면 ‘간지’가 안났다. (그 떄는 저 말이 유행이었다.)
이제 배운거라곤 전시에서 티켓을 뽑아주는 일이었다.
BEP가 뭔지도(아직도 잘 모른다.. 뜻만 안다.), 티켓 매출 예상 수익은 어떻게 잡는지도 하나도 배우지 못한 채
전시장에 온 관람객과 싸우는 일만 배웠다.
(당시에는 손님한테 친절함보다는 우리의 규정을 설득시키라고 배웠다. 이 회사는 나중에 노선을 완전히 바꾼다. 나만 바보가 되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쳐가면서 ‘간지’도 안 나는 일을 계속 하려니 너무 괴로웠다.
내가 꿈꾸던 공연기획자의 꿈은 자꾸만 멀어졌다.
그 와중에 동창 한 명은 전혀 상관없는 과에서 공부를 하다가 연극 동아리를 통해 연출가가 되었고,
한 명은 뮤지컬 동아리를 통해 공연에 데뷔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회사는 자꾸만 돈이 안되는 자체컨텐츠에 집착하고, 돈이 많이 드는 다른 회사의 컨텐츠를 끌어다 전시하는 일에 집중했다.
결국 회사는 ‘메르스’를 핑계삼아 파산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직원분들은 다들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나도 나오게 되었다.
이 회사에 입사를 하고, 사원이 되고, 진급을 하고, 공연을 만들고 싶었는데 갑자기 눈 앞에서 모든게 사라졌다.
그렇게 인생의 목표가 사라지고 아일랜드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했다.
처음엔 돈을 모으려고 공장에 다녔다. 공장 일은 정말 어렵지 않았다.
젊고 나름 머리가 좋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인 나는 무슨 파트에 넣어도 일을 척척 해냈다.
다행히도 손도 빨라서 라인에서 밀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파트장과 QC분은 나를 너무 좋아했다.
사장도 당연히 나를 너무 좋아했다. 타 업체 납품현장에도 데리고 가고 했다. (같이 가서 검수하자고)
그렇게 몇 개월 일했는데, 회사가 어려워져서 그만 나오라고 했다.
공장에 다니는건 재밌었다. 일은 쉽고, 집 근처고, 밥도 잘 주고.
집에 와서 응팔 보는게 낙이 되었다.
하지만 돈을 모으기 위해서라지만 이렇게 모으다가는 공연 업계에서 경력 단절이 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단기 계약직에 지원했다.
감사하게도 합격했고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국제 페스티벌에서 티켓 마스터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으로 회사다운 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내 명함도 나오고, 사원증도 있고, 무려 내 책상과 컴퓨터도 있었다.
단기 계약직으로 돌아가는 페스티벌이기때문에 사수는 그동안 근무하시던 분들이 남겨든 문서였다.
동갑내기 동기들과 정말 재미있고 끈끈하게 잘 지냈다.
페스티벌은 사고 없이 잘 마무리되었고, 외교부에서 수주받은 페스티벌도 잘 마무리했다.
회장님이 나를 정말 좋아했다.
나만큼 컴퓨터를 잘 다루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당시에 회장님 강연에 가서 ppt를 타이밍 맞춰 틀어드리고 하는 일만 했는데,
왜 컴퓨터에 문제가 생기고 빔과 연결은 어떻게 하고 하는지 아는 직원이 내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계약이 끝나고도 회장님은 나를 찾았다.
페스티벌에서 일하면서 아일랜드 워킹홀리데이에 합격했다.
출국 전까지 5개월 정도 남짓 시간이 남아 두 달 정도 공장에 더 다녔다.
집 근처는 아니라 몸이 많이 피곤했지만 공장은 돈 쓸 일은 없고(옷도 아무거나 입고 다니고 밥도 사주니까)
연장근무나 휴일 근무하면 시급이 몇 배가 되기 때문에 돈을 모으기 위해서는 꼭 해야했다.
그리고 남은 세 달 정도는 친구가 매니저로 있는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아일랜드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왔다.
아일랜드에서 비자가 만료되기 1달 전에 이전에 일하다 망한 공연기획사에서 연락이 왔다.
새로운 전시를 할건데 제주도에서 할거다.
와줬으면 한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제주도로 갔다.
회사는 이전과 같은 사람도 있었고 다른 사람도 있었다.
원래는 열몇명 하던 작은 회사였지만 갑자기 스무명이 넘는 중소기업이 되어있었다.
제주도에 넓은 부지에 멋진 건물을 짓고 요즘 라이징하는 전시로 이름을 날리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표님의 ‘내 말 잘 듣는 애들’ 모음집에 회사는 능력 위주보다는
학연, 지연, 혈연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회사 시스템은 주먹구구식이었다.
운영 메뉴얼 하나 없이 아르바이트들에게도 매일 구두로 상황을 전달하고 가장 활발하게 운영되는 채널은 카톡방이었다.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카톡으로 지시받고 카톡으로 회의했다.
‘리더’들만 회의했고 직원들은 매일 회의 내용을 소문으로만 들었다.
그렇게 매일 회사 시스템을 고쳐가기 위해
- 아침 브리핑을 합시다.
- 카톡을 줄이고 정식 회의를 소집해주세요.
라는 이야기를 매일 했다.
내 윗사람은 나보다 전시 시스템을 모르는 완전 초짜지만 대표의 친구의 와이프의 동생으로서 매번 승진했다.
그 사람은 나와 내 또래 직원들에게 아이디어를 모아 본인이 취사선택하고 결과물을 우리에게 만들라고 요청해서
대표에게 보여주는 일을 했다.
대표는 친구의 와이프의 남동생인 그 사람을 예뻐했고, 우리는 계속 사원이라는 자리에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매니저에서 대리, 대리에서 과장이 되는 동안 우리는 계속 사원이었다.
이유도 모른채 연봉은 5%도 오르지 못했고, 아르바이트가 아닌 정규직으로 지내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나는 더 성장하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고, 이직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사내연애로 남자친구가 있었고, 대표는 매일 더 잘되게 하겠다, 금방 성장하게 하겠다 하는 공수표를 매일 남발했다.
결국 회사는 서울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했고 회사는 다시 한 번 변혁이 일어났다.
그리고 코로나가 터졌다.
서울 사업은 소생할 수 없을 정도로 추락했고, 덕분에 잘 되는 제주 사업도 큰 타격을 입었다.
회사의 월급은 70% 보전이 전부였고, 확진자가 늘어나면 한 달 간 문을 닫았다.
당시에는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고하면 엄청나게 이미지가 안좋아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관광지가 이미지 보전을 위해 선제적으로 문을 닫았다.
이 때를 틈타 제주도에서 코딩 공부를 시작했다.
이직을 할 거라면 이런 사회적인 사건에 타격이 없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도 당당하게 어디에서 일한다고 무슨 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코로나가 쉽게 잠잠해지지 않았다.
서울 사업은 문을 닫았고 서울 직원들은 대부분 희망 퇴직을 했다.
제주도 다를 바가 없었다. 대표는 매일 얼굴은 비추지 않고 메일로 희망퇴직을 권고하는 듯한 말을 했다.
결국 대부분의 직원들이 희망퇴직을 선택했다.
(나중에는 자기가 나가라 한 적이 없는데 다들 회사를 버렸다는 식으로 이야기해 화가 많이 났다.)
그리고 나는 서울로 올라와 국비 교육을 신청했다.
실업급여를 받으면서 공부를 했고
그리고…